타자의 주체
레비나스의 ‘타인의 얼굴’을 간간이 읽는 중이다. 타자의 주체성을 존중할 때에 비로소 자신도 존중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개념인데 이론적으론 완벽하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그것이 적용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것은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개개인의 특성에 기인하는 의문을 파생케 한다.
온전히 타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또 타자의 타고난 특성들을 하나씩 발견하며 타자를 입체적으로 파악해나갔다는 전제하에 타자의 입장을 자신보다 더욱 잘 이해하게 되는 수준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하여 타자가 내뱉는 생각들과 그의 가치관을 이해해주는 일방적 상황이 되었을 때 과연 타자는 나 자신에 대해 얼만큼 이해하고 있을까?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타자 자신만 이해받는 상황을 즐기며 자기 위주로 행동하게 될 것인가? 여러가지 경우의 수가 생겨난다.
물론 이상적인 경우로 말하자면, 타자 역시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우리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길 바라며 그것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에 관해 다방면으로 관심을 갖게 되고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게 되며 미묘한 차이로 섬세한 배려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국가 체제에서 개인의 개성이 무시되고 개인의 부품화가 되는 과정도 점점 완화될 수 있다. 자본주의로 묶인 사회규율이 인간의 개성을 존중하는 사회로 옮겨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적인 시나리오다. 내 시선이 회의적인 까닭은 개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이기심과 자기 중심적 태도, 오만 따위 때문이다. 박애주의적 관점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느정도 자신만의 이기심을 가지고 있다. 주변 환경이 자신을 떠받들어 주는 상황이 되면 자신이 높은 위치로 상승했다는 쾌락에 취해 오히려 주위 사람들을 무시하게 되고 갑을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구도로 흘러갈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개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지향한다는 것은 결국 개인의 안 좋은 특질까지 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그리고 그러한 특질로 인해 전체주의 따위가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간과돼서는 안 된다.
자신의 주체와 타인의 주체, 어디에 비중을 두고 집중해야할 것인지 여전히 의문이다. 어쩌면 개인들의 무수한 개성적 특질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각자가 원하는만큼 비율을 나눠 접근해야하는 상대적 연구과제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