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은 화폐를 벌어야만 하고, 또 써야만 하는 사이클 속에서.
억압된 욕망을 상쇄시킬 출구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문화산업'이다.
향유하고, 만끽하며,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여러종류의 문화산업들.
개인들의 욕망을 공감각적으로 간접해소시켜줌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유지체계를 정화시키는 순기능을 하고 있다. 반작용으로 싸이코패스를 양상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실제 문화산업을 소비하며 일부의 억압이 풀리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지만 해소과정은 생략되어 있고 (외부 환경으로 분출될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개인의 내면에 쌓여간다. 그러다보면 현실속에서 윤리적인 행동 영역이 붕괴돼 일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지나친 인내의 끝은 파괴이며 동시에 절망이다. 개인의 내면 자체가 부서지며 붕괴되는 하나의 건물을 상징한다. 견고하게 지어진 건물이라면 상관없지만, 기초부터 부실공사로 지어졌다면 너무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 것이며, 견고한 건물이란 가정을 해도 건물이 버틸 수 있는 무게를 넘어선 순간 게임 오버가 된다. 하지만 문화산업 분야가 개인이 스트레스를 효과적으로 견딜 수 있는 범위의 항상성을 유지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것은 달콤한 환각이며, 연기가 자욱한 가림막이다.
넓은 시각으로 보았을 때, 삶이란 고통과 쾌락으로 점철돼 있다. 쾌락이거나 고통이거나 혹은 고통이거나 쾌락이다. 평온한 상태는 사실 쾌락을 만끽한 후에 찾아오는 평화다. 쾌락이란 충동을 포함한 포괄적인 행복의 영역이라 했을 때, 고통은 첨예한 갈등과 부조리한 상황의 연속을 들 수 있다. 두 종류의 그래프가 하나로 이어져 줄다리기를 한다. 그런데 이때,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닌 자본주의의 틀에서의 안락함을 택한다면 쾌락은 오로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수단인 돈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어진다. 하지만 그 돈을 쓰는 것은 일순간은 쾌락을 상징할 수 있지만, 그 후 긴 시간은 고통이 따른다. 때문에 쾌락 후에 평온함이 이어지다가 결국 고통으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트레인 스포팅'이란 영화를 보고 생각컨데, 이완맥그리거가 마약을 소비하는 음지의 소비자에서 결국 돈가방을 들고 튀면서 양지의 소비자가 되며 스토리는 끝맺음된다. 소비자, 소비를 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 사회. 생필품이 되었든 쾌락적 요소가 되었든 소비는 필수적이다. 소비를 하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런 사회에서 자신이 되고자 하는 (특히나 예술계열은) 무언가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태어날 때부터 성장환경이 유복했고 적극적인 부모의 지원을 받고 성장했다는 전제가 필수적이어야만 한다. 꿈을 선택한다는 것은 돈을 벌지 않기를 택하겠다는 말, 소비자의 자격박탈을 상징한다. 꿈을 이루기 전까지는 그러한 애매한 영역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 영역은 서늘하고 추우며 누구도 따스한 손길을 주지 않는 고독으로 가득차 있다. 때문에 꿈을 내팽개치고 안락한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선택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현재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가 양산해나가는 '욕망의 산실'이 일으키는 부작용이 비가시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긴 세월을 놓고 보았을 때, 억압된 인간의 유전자에 변형이 가해질 것이며 그것은 좋지 않은 방향으로 뒤틀린 괴물을 태어나게 할 지도 모른다. 타고난 본성을 거스르고 자본주의란 거대한 생체 기계의 부품이 되게끔 개개인들의 생활을 억제한다는 것은 여태까지 밝혀지지 않은 괴이한 질병과 증후군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은 실험용 흰 쥐를 지속적인 스트레스 상태에 놓기에 한다면 그리고 그 쥐가 한마리가 아니라 여러마리라면. 그들 사이에서 번식으로 태어난 새끼쥐는 굉장히 히스테릭한 성향을 가졌을 것이다. 그 유전자가 또 다시 스트레스를 받고 변형을 일으켜 그게 다음 DNA로 이어지고 점점 변형을 일으켜 뇌의 일정 부분이 과도한 변형을 일으키게 된다면 말이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지키고 있던 윤리성이나 도덕성 그리고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이나 개인이 원하는 무언가를 상실하게 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진다. 절대 다수의 삶은 되물림 되는 변형된 유전자로 인해 기형적인 돌연변이를 탄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코 앞의 현실, 눈앞에 맞닥뜨린 현재만을 살아가서는 안 된다. 근시안적으로 대다수의 삶을 자본주의 기틀 아래 희생시킨다는 것은 결코 미래를 위한 선택이 될 수 없다. 보다 인간적인 방법을 찾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끔 시스템을 변화시켜가야할 필요성이 있다. 혹 누군가는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로 그 부분을 잘라내면 되지 않겠느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하나로 기록된 유전자의 일부를 잘라낸다면 아무런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을 것인가? 그것역시도 의문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