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장소에 가든지 (그게 집일지라도) 지나치게 밀접한 거리로 타인이 다가온다면 그 순간 다양한 감각이 내면에서 발생한다. 당혹감, 놀라움, 불편함, 강요, 신경쓰임, 방해, 침해. 한 마디로 불청객으로 취급받을 상황을 불러일으키기 된다는 말이다. 일정 시간을 공유하는 가족, 친구, 연인도 때로는 거북함이 차오르는데 하물며 완벽히 타자라면 어떠한가? 전혀 달가울 수가 없다.
퍼스널 스페이스를 처음으로 붕괴시키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사회화 과정을 내포한 필수교육과정인 학교 혹은 유치원이다. 개인과 개인이 부대끼며 소통하고 교류하는 것이 사회화의 첫계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외향적인 타입과 내향적 타입은 받아들이는 감각 자체가 달라진다. 내향적 타입은 말그대로 불편함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빼앗기고 소진하며 매일매일이 삶의 고단함을 걷는 과정이다. 강제로 외향적인 성격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하여도 오히려 반작용이 일어날 뿐이다.
퍼스널 스페이스, 개인을 존중하는 영역이 허물어지고 급속하게 이룩한 사회발전을 따라 경제 활동에 편승하는 것만이 현시대의 세태인데 그것은 결국 개인의 소멸을 야기하는 부작용을 날 것 그대로 방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어 수업때 들은 바대로라면 외국에선 퍼스널 스페이스가 당연하게 지켜져야하는 예의에 속해있다고 한다. 한 예로 자신의 집에 있을 때 옆집에서 소란을 피우고 민폐를 끼친다면 곧장 경찰에 신고를 해도 무방하다고. 개인주의로 발달한 유형의 나라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벽이 강력하게 존재한다면 단점도 있긴 하다. 휴머니즘보단 자기 자신만이 뛰어나단 인식 속에 갇혀 더불어 사는 사회에 대한 도리를 소홀히 하게 되는 수순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함께 살아간단 명제에 근거에 자기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개인들의 범람은 더욱 이상한 일이다. 개성을 상실한 채 텅 빈 시선으로 세상을 응시한다 한들 자기 스스로의 가치관을 세우거나 자신의 의견을 다수에게 주장할 권리 또한 쟁취할 수 없다.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자동화 반응으로 일관하며 삶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은 사회화에 편승한 채 자기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자화상이다.
나 역시도 마리오네트가 된 자신을 벗어나기 힘들단 걸 자각하고 있다. 쾌락적 요소들의 집합체인 인터넷 공간을 휘저으며 게임에 심취하거나 자극적인 기사의 댓글을 탐닉하기도 한다. 그것은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것일까? 반대로 쌓이는 행위가 되는 것일까?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착각 속에 갇혀서 현재의 자기 시간을 버리는 행위는 아닐까? 유일한 탈출구처럼 느껴서 쾌락소비를 선택하지만 결과는 어떠한가?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상태로 시간만 흘러있고 현실을 회피하는 자기 자신이 과거에 갇혀서 버둥거리고 있지 않은가?
현실을 마주하고 해야할 일을 해야 하는 심리적 압박과 강박스러움을 털어내 버리는 쾌락소비는 발전과 상반되는 영역으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퍼스널 스페이스의 붕괴로 인해 발생하는 개인의 소멸은 한 사람의 인생을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시킬 파괴력으로 치닫는다. 자신과의 싸움 어쩌면 세상과의 싸움을 펼쳐내며 외부적 쾌락요소들을 벗어난 지점에는 무엇이 있단 말인가? 개개인의 독창성, 활발한 사유, 진정한 의미의 소통, 유익한 쾌락, 올바른 시각. 소중한 것들을 발견하고 현재를 음미하며 다채롭고 신선하게 삶을 누리기 위해서 개인의 침해받지 않을 공간을 존중하는 사회가 나타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