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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멸의 순간

J.H. 2018. 11. 2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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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을 쫓고 있단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삶이란 시각적인 환상으로 채워진 레일 위를 달리는 순간의 연속이다. 다양한 선택들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인생이 펼쳐진다. 아니, 사실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종착역은 ‘죽음’이니 말이다.

허상이란 배경들 속에 타인들도 포함된다. 우리가 느끼는 건 결국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환상과 빛에 반사된 물체의 색, 그리고 형태에 대한 촉감, 특정한 향기,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뉴런과 시냅스의 확장. 소리를 통한 세계의 인식, 혀를 자극하는 질감과 맛. 이러한 본능적이고 지각적이며 감각적인 영역의 것들로 삶은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실재이면서도 인식과 관련된 요소들이며 육체의 인식기능이 저하되면 (건강을 잃거나 노화로 인해) 일종의 막 혹은 벽이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것처럼 세계와 나 사이에 약간의 거리가 생기게 된다.

세계를 향한 ‘환멸’은 약간의 거리감을 발견한 순간 발생하는 부작용의 일부다. 영화 ‘트루먼쇼’에서처럼 자신이 속한 세계의 끝을 발견했을 때를 떠올리면 된다. 트루먼은 자신의 세상이 붕괴되는 순간을 맛본다. 24시간 방송되는 리얼리티 쇼의 주인공인 ‘트루먼’은 자신의 세상이 거짓으로 지어진 세트장이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환멸’이 어린 눈동자로 진짜 세상으로 나갈 문을 응시한다. 믿기지 않고 사실 믿고 싶지도 않은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하지만 더 큰 시각으로 보았을 때 우리 각자의 삶도 자신의 눈동자가 카메라가 되어 끊임없이 돌아가지 않는가? 자신의 세계, 자신만의 쇼, 자신만의 삶.

‘환멸’ 그 뒤엔 무엇이 있느냐 질문한다면,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본래 세계는 무다. 가시적인 것들도 형태와 질감, 텍스쳐라는 공감각으로 이루어진 환각이며 그것은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유한한 것이다. ‘환멸’이란 무언가가 소멸하거나 부서지거나 사라질 때 겪게 되는데 ‘환멸’을 겪은 이후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시시때때로 삶 속으로 파고들어 염세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시각을 갖게 만든다. 어차피 다 거기에서 거기일 뿐이라는 명제가 머릿속에 자리잡고 세상을 바라보는 척도가 되어 모든 것들을 감정에 연관없이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흘러가면 흘러가는대로, 강가에 앉아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듯 그저 응시하는 것이다. 때로는 덥고, 때로는 춥고, 가끔은 따뜻하다. 감정의 변화를 증폭시키거나 축소시키는 것도 결국 ‘자기 자신’이란 필터를 거치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환멸’의 순간은, 세상과 더욱 분리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 인간으로 인한 ‘환멸’이 내가 받아들이는 경험들에서 파생되어 마음을 비좁은 틀 안에 가둔다. 타인의 굴곡진 시각과 비틀린 시선은 일종의 ‘감옥’과도 같다. 타인은 ‘교도관’이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한 개인에 관한 것을 제멋대로 재단한다. 누구나 자신이 주인공인 삶을 살고 있기에 벌어지는 이기적이고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현상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난다.

세상으로부터 멀어져 자연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환멸’의 끝자락을 걷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혹은 나는 그 ‘환멸’의 순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환멸’ 역시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듯 자연스레 넘겨야 하는 찰나의 돌풍 같은 것일까? 삶의 모든 순간이 의미가 있다면 모든 순간이 의미가 없다는 말과 같다. 몇 차례 다가오지 않을 최고의 순간을 위해 인생은 계속 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일상을 살아가며 우리를 쾌락의 늪으로 끌어당기는 쾌락적 도구들은 어떠한가? 쾌락의 좋음을 만끽하며 인생을 즐기는 것이 우리들 삶의 목적인 것일까? 방관자처럼 그저 인생을 관조하며 타인을 돕는 박애주의적 인생은 어떤가?

‘환멸’의 순간, 우리들은 선택을 한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동그란 판을 임의로 멈춰 직관적으로 선택을 하든, 고심하고 고뇌하며 하나를 선택하든, 혹은 어느것도 선택하지 않고 현재까지 살아온 인생을 살아가든. 답보, 혁신, 운에 맡기는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변할지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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