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안정감’이란 참 중요한 것이다. 가족, 친구, 함께 일하는 동료들 그리고 연인. 네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루었을 때 한 사람은 온전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상에게서 안정감을 얻는 차이도 존재한다. 누군가는 가족 혹은 친구가 자기 삶의 중심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연인이나 회사가 중요할 수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내내 불완전함에 시달리다가 관계로 인한 친밀감을 기반으로한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의 달콤함을 ‘꿀맛’같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안정감이 무너지는 순간 인간의 삶은 눈깜짝할 새 나락으로 떨어지고 일상을 반복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나는 바로 그 점이 신기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안정감과 일상은 분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은 매일의 반복이다. 그것은 자동반사형으로 머릿속에 기록된 행위를 순서대로 행하는 것이다. 안정감이 필수불가결하게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시점에서 바라봤을 때, 안정감을 주는 요인도 일상의 일부기이에 자동반사형 행동이 멈추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것도 일부는 맞다. 그러나 안정감을 주는 요소는 생각보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이것은 물론 이성적인 접근에서를 말한다.
반면에 감성적으로 접근하자면 한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소통하는 순간의 기쁨은 고독을 상쇄시키고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며 긴장을 완화시켜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감성의 영역은 자신의 상황에 따라 양극단으로 치닫곤 하는데, 예를 들어 오늘 특정한 일 때문에 불만이 쌓인 상태라면 가장 위안이 되는 친밀한 사람 역시도 안 좋은 시선으로 즉, 편파적으로 볼 수 있을 가능성도 올라간다.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의 단점은 양극단으로 선택을 이끈다. 개인의 이성은 이 순간만큼은 다른 곳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머릿속이 온통 감정적 요인들로 가득찬다면? 인간의 사고능력과 인내심이 줄어들어 눈 앞에 놓인 상황들을 자기위주로 해석해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반대로 긍정적이누요인으로 이루어진 감정의 영역이라면 한없이 자애롭고 온화한 상태를 유지할 수도 있다. 혹은 감정변화와 함께 긍정적인 모습에서 강력한 이기주의로 옮겨가 극단적 행동변회양싱을 보이는 케이스도 있을 것이다.
채워지고 받아들이고 다시 비워내는 과정, 감정의 영역에서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질 수 없다. 명상과 휴식, 여행처럼 현실을 내려놓고 훌쩍 떠나 긍정적 요인들로 자신을 환기 시키는 과정이 필요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특정 대상에게서 얻을 수 있는 ‘안정감’은 감정의 파도에서 우리를 보호해주는 보호막이 되곤 한다. 타인을 향한 친밀감과 그 친절한 교감이 돌아오는 순간의 따뜻함. 이성적 시각에서는 추상적 개념으로 인식되는 찰나의 위안이 인간을 채우는 영혼의 양식이 되어 인생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다면 이성의 영역이 조율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개인의 삶이 있어 이성적 사고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은 부수적이고 파편적인 시간들일까?
하루종일 인간들은 감정에 휩싸인 채 주변을 감정적으로 판단하며 살아가는데 그 사이사이에 순간적으로 실리를 따지며 계산을 하거나 독서 혹은 신문, 뉴스를 보게 된다. 그 찰나의 시간동안 감성이 아닌 이성으로 사고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 순간마저도 감성이 작동한다. 감정은 단 한순간도 인간을 놓아주지 않는다.
이성이 활성화 되는 전제조건이 감성의 ‘안정감’이라는 토대는 확실하게 알겠다. 우리는 감정이 안정적일 때 평온하게 일상을 살아가며 나아가 지식을 습득하는 일에도 집중할 수 있다. 학생은 공부를 성인은 취미를 즐기며 인생에 가치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성은 어느순간에 효율적으로 쓰이는 것인가? 사람들의 갈등을 해결하는 순간 재판소에서 논리적으로 증거와 증언을 통해 죄를 가할 때, 수학이나 과학같은 특정 이론과 가설들을 증명하기 위해 연구를 하고 통계를 내고 과정을 도출해냈을 때, 철학과 인문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사회와 구조를 사유하며 논거를 나누고 발전 방향 혹은 현실에 대한 분석을 할 때.
대다수의 삶에서 이성은 감성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붙들여 독립된 감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일상에서 인간들은 늘 감성에 휘둘리며 판단하고 선택을 반복한다. 이성은 이방인이며 방관자다. 즉, 인간들을 컨트롤할 수 있는 핵심요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쩌면 특이케이스로 어린시절부터 ‘안정감’을 갖지 못한 (부모, 연인, 친구의 부재) 유형의 경우는 심리적 감정공감 능력이 비정상적으로 낮은 상태로 성장해 현대인들과 단절된 삶을 택할 가능성도 있다. 애정결핍이라는 틀 안에 자신을 가둔 채 살아가는가 하면 완벽하게 이성적 사고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이성마저도 존재하지 않을 시에 무법자가 되는 케이스도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감정의 충족과 안정감은 그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며 이성보다도 더욱 큰 영역에서 인간의 삶을 주도하고 판별하며 이끌어가고 에너지를 불어넣는 핵심적인 가치에 부합한다. 무한 경쟁을 야기하는 물질만능주의는 이러한 사람들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타인을 함께 관계를 이어나가야할 대상이 아닌 배척하고 몰아내야할 해로운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부정적 감정요인을 극대화시켜 삶의 질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인간이 행복을 향유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선 지금보다 경쟁에 있어서 완화된 사회구조가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돕고 도와 시너지를 내어 인류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그러한 시스템이 실행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