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입식 교육에 의해 개성은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면 개성으로 표출될 에너지가 쾌락을 통해 소비되는 것으로 변형되는가?
망각이 찾아오는 지점은 개성이 흐릿해지는 순간이다. 개성은 무엇일까? 주입식 교육 이전에 존재하는 타고난 본성이다.
'사회화'라는 과정이 인간에게 주는 혜택 이면엔 '개성의 상실'이란 부작용이 있다. 혼란스러워진 마음은 관습적인 행위를 택한다. 인간의 3대 욕구에 충실한 본능을 채우는 것에 급급해진다. 자동반사형 사이클에 몸을 내맡긴 채 '개성'은 죽어가고 있다. 세상에 넘쳐나는 각종 즐길 거리는 망각을 부추긴다. 업무에 대한 중압감과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떨쳐 내는 방식은 상업화에 따라 오로지 '쾌락 소비'에 집중된다. 게임, 유흥, 도박 등의 각종 쾌락 극대화 시스템은 한계점을 넘어 과해지는 순간 인간성을 훼손시키고, 삶의 질을 현저히 떨어트린다. 제대로 인생을 살아갈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드는 것이다. 사회 도처에는 제어장치가 없는 지뢰가 즐비하며, 사람들은 그 유혹에 걸려들곤 한다.
대체 왜 이런 구조로 사회가 이루어져 있는가 그게 의문이다.
자본으로 구분되는 계층구조와 해당 계층에 소속된 사람들 간의 갈등들.
'총균쇠'의 앞부분을 읽다가 발견한 생각은, 온순한 타입의 유전자와 혁명적이고 공격적, 지배적인 유전자 사이엔 괴리와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후자의 유전자는 더욱 빠른 발전과 번영을 하게 되고, 전자의 온순한 유전자는 원시인의 상태에 머무름을 택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수렵생활과 산업혁명으로 자동화된 편리한 문명의 차이만큼 전 세대에 거쳐 어그레시브한 유전자가 발전테크를 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계층 구조에 비교해보았을 때, 상위계층을 거머쥔 사람들은 지배적인 유전자를 가진 이들로 분류하고, 하위계층은 안주적이고 소극적인 유전자로 분류할 수 있을까? 일리 있는 생각이라고 본다. 안주하는 것에 길들여지고, 타인의 불의에 침묵하고 회피하는 유형의 유전자는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유전자의 그늘 하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만일 온순한 유전자에 혁명적인 기질이 있다면, 그 부분은 또 생각이 달라진다. 시민단체와 공익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이 이 유형에 속하지 않을까? 차분하게 사태를 들여다 보는 인내력과 불합리한 사회 구조를 개혁시킬 의지를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여러 계층들과 세분화된 기질을 내포한 유전자들로 분류된 인류가 뒤섞인 '사회'라는 곳은 인간이 만들어낸 거대한 생태계다. 그 안엔 강자와 약자, 그 중간의 계층들이 먹이사슬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아프리카 사바나 초원의 포식자들과 초식동물처럼 혹은 하이에나나 하마처럼, 매일 다양한 일이 벌어지며 인류의 문명이 흘러가고 있다. 인간은 그러한 문명과 사회를 이루는 하나의 세포들이다.
하지만, 개개인의 개성은 사회화에 의해 훼손되어서는 곤란하다. 타인의 삶에 침해될 정도의 개성은 다듬어지는 것이 좋지만, 단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받아야 할 까닭도 없다. 고유의 순수한 영역에서의 개성은 사람들마다 다르게 가지고 태어나며, 인간적인 면도 바로 그 안에 담겨져 있다. 회색 수트를 입고 그림자처럼 '나'가 네가 되고 네가 '나'가 되는는 페르소나 무한 복제의 사회에 익숙해지는 건 즉 온순한 유전자의 머무름을 택하는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는 자본이란 환상 개념 아래서 묵살되고 있다. 끊임없이 소유하고 소비하는 시스템의 반복으로 세워진 자본주의의 맹점이다. 있지도 않은 어음으로 순환시켜 자금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 나타난 인간 노동의 소외는 방치되고 있으며 매해 교육을 마친 젊은 사람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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