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과 사회 그리고 세계. 여러가지 제약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우리가 속한 계층에서 일어나는 각양각색의 사건들과 또 고정관념들은 아주 예전부터 이어져온 관습의 산물들이다. 개인의 숙명과도 같은 제약적인 관습들은 결국 여러가지 두려움들을 생산해내고 계층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렇게 사회의 일원이 되어 적응해 살아간다면 카멜레온이 주변 환경에 자기 몸의 색을 바꾸는 것처럼 그 환경과 친화되어 일종의 안정감을 느낄 수도 있다. 특정 장소에 맞는 ‘페르소나’를 바꿔서 쓴다는 접근도 가능하다.
‘성공’을 바라면 성공이란 제약이 세워지고, ‘행복’에는 행복의 ‘쾌락’에는 쾌락의 ‘부자’에는 부자라는 벽이 들어선다. 그것은 ‘목표’라는 잣대로 규정지어 지곤 하는데, 내면의 혼란스러움 속에서 위의 목표들을 이루어 간다 하여도 진정한 행복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면의 혼란과 불안을 야기하는 요소들을 자기의 의지 하에 잘라낼 수 있다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 평온함을 먼저 찾는 것이 이롭다. 자신의 의지대로 바꿀 수 없는 결과라면 애초부터 그것을 강제로 바꾸려는 마음을 먹을 필요도 없을 뿐더러 신경을 쓸 이유도 없다. 그것은 원래의 태생 자체가 그런 것이다. 바위가 바위의 성질을 가지고 물이 물의 성질을 가지는 것처럼 말이다.
내면의 평화로움이 기반이 되었을 때, 그 상태에서 자신이 선택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삶이 안정적인 느낌이다.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노력은 필연적이지만 하나의 목표에만 집중한다면 외부적 요인들이 페이드아웃되며 시간이 급속도로 흘러가 어느새 목표에 가까워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중간지점에서 목표에 의문을 가지고 진로를 수정할 수도 있다. 단지 고립되고 멈추는 것은 자신을 방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의 개성은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고 제 3자가 보는 내 모습과 내가 보는 모습 사이의 진실된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혼자만의 명상이라든가, 고립된 생각들의 파생은 추상적인 무언가에 불과할 뿐이다.
-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를 읽고 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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