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가설에 대해
1. 우리가 만약 빅데이터를 위한 수집용 세포에 지나지 않는다면?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다. 무언가 거창하게 우리 자신의 삶을 포장하고 그럴 듯한 위치나 명예를 갖기 위해 고군분투하려 해봐도 한계점에 다다르게 되면 극도의 허무함이 밀려오는데, 그럴 때 우리들의 발버둥침 그 무의미함을 자각하게 된다. 결국 모든 생명체들은 '죽음'이라는 궤도의 끝을 향해 매순간 매초 달리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는 내내 경험하고 선택하길 반복한다. 점점 나이가 들고 외관이 어린 시절을 알아볼 수 없을만큼 변해버렸을 때 그 이후에 다다를 곳은 결국 영원한 수면 뿐인 것이다.
그러한 개인의 삶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느냐, 그게 갑작스레 떠오른 나의 의문점이다.
지극히 평범하게 태어나 별다른 사고없이 성장하고 다들 들어가는 회사를 가서 적당히 월급을 받으며 살다가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애를 키우며 점점 회사에서 승진을 하거나 경제적 안정을 갖게 되면서 중년의 삶이 지나면 쇠퇴기가 찾아와 사회의 밖으로 내쫓기게 되는 것이 대체적인 인간이란 종의 삶이라면, 나는 그것이 일종의 프로그래밍된 현상이 아닐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진 거대한 운명이란 허상의 실체로 여러가지 삶을 DNA에 저장하기 위한 진화적 측면에서의 희생양으로 우린 그저 인간이란 종의 발전에 수집되기 위한 빅데이터 세포조각 하나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수의 정보가 기록된 DNA는 인간의 탄생부터 현재까지 담겨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 뿐만이 아닌 모든 지구에 존재하는(혹은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체들도 마찬가지다. 진화와 돌연변이 과정, 환경의 변화로 인해 특성과 외형이 변하는 과정까지 전부다 DNA에 새겨져 있다. 물론 인간의 경우는 조금 더 세밀하고 특별할 것이란 추측을 해본다. 사실상 자연재해 빼고는 현재 인류를 멸종시킬 (인류가 발견한 핵을 제외하고) 먹이사슬의 꼭대기는 비어있다. 인간군상의 오밀조밀하게 조직화된 복잡한 사회구조는 무수한 역사를 거쳐 안착된 것으로 여타의 생물들과 다른 비약적인 발전을 거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보았을 때 인류역사 자체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발전시킨 위대한 사상가나 과학자들은 여태까지 태어나고 사라져간 무수한 사람들의 머릿수와 비교해봤을 때 극소수에 불과하다. 왜 다수는 인류 발전에 기여하는 핵심적 인물에서 동떨어진 생활체(일반적인 삶)로 살아가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놓칠 수 없다. 왜 다수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발견할 수 없을까? 왜 극소수는 자신이 원하는 길만 가는 것일까? 왜 다수의 삶과 소수의 삶은 달라야 하는 것일까? 여러가지 의문점들이 공중에서 동시에 부딪혀 파생음을 만들어 낸다.
어쩌면 다수의 삶은 극소수의 위대한 인간들이 불러일으키는 시류를 탄 삶에 정착해 살면서 빅데이터 수집을 하는 실험적 존재들은 아닐까? 때문에 눈앞에 놓여진 환경 자체에만 집중하며 개인적 삶에 몰입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보다 다수를 위한 공리를 떠올리는 사람은 역시나 극소수에 속한다. 또 왜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일까? 객관적 지표를 들이밀면 책을 읽는 것은 필수적으로 느껴지지만 대부분 독서를 꺼려하는 사람들의 대답을 들어보면 선택의 영역이란 것이다. 현대에 우리 주변엔 감각을 마비시키며 쾌락을 만끽할 수 있는 요소들(게임, 영화, 음악)이 범람한다. 쾌락의 선택이란 달콤함을 들이미는 자극적인 스펙트럼 안에서 인문서의 역할은 미비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결국 세상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킬 극소수는 방대한 양의 독서를 통해 인간사의 빅데이터에 대해 연구하지 않고는 자신이 원하는 사상을 실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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