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순간을 '진심'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쾌락이나 개인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4대 성인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그러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선 붓다처럼 쾌락을 향한 본능을 전부 거세한 채 세상의 진리를 탐험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밖에는 없을 뿐이니까. 만일 그 '진심'이라는 게 욕망과 관련된 것이라면 모두가 진심을 다해서 살아간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내가 말하는 '진심'이란 지극히 순수한 영역의 숭고한 것이다. 타인을 위한 희생이라든가, 인류를 위한 보편적 가치를 위해 연구하는 것이라든가, 이기심과는 연결됨이 없는 박애주의에 가까운 개념이다.
때로 인간은 사랑에 빠진다. 사랑은 굴절된 렌즈와도 같다. 한 대상을 비현실적으로 미화시키며 사이비 종교처럼 추앙하게 된다. 자신이 빚어낸 조각인 '갈라테이나'를 숭배하는 피그말리온처럼. 그것은 환각일까, 아니면 진짜일까? 사랑에 빠진 대상에겐 진짜다. 자신이 창조한 환상적인 대상, 찬미를 보내던 매순간의 쾌감을 놓아버린다는 것은 그 환상이 다른 대상에게 옮겨갔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오로지 한 상대에게만 빠진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결국 그 상대도 한 명의 사람에 불과하며, 그 상대를 통해 투사한 환각의 이미지들만이 묘하게 뒤엉켜서 상대가 지닌 고유성과 단점들을 전부 제거해 자신만의 테피스트리를 구성한 뒤 신앙과도 같이 숭배하는 과정을 밟는 게 기형적이라는 것이다. 굴절된 이미지들 속에 파묻혀 다채로운 쾌락을 만끽하며 흘러가는 시간들은 젊음을 녹여내 정제한 가루다. 가루는 삽시간에 바람에 휘날려 젊은 날의 기억들 속으로 숨어버린다. 시간의 무상함과 삭막한 시간들이 '이별'이란 단어속에서 고개를 들 때, 환각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마치 마약을 끊어야 하는 중독자들처럼 엄청난 고통에 휩싸이게 된다.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 '사랑'은 숭고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보이는 만화경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빛이 강렬한 만큼 어둠 역시 깊다. 이별은 그 어둠에 잠식당해가는 과정이다. 환각의 대상이 차츰 붕괴되며 균열이 가고 처참하게 무너져가는 순간들을 지켜봐야만 한다. 파편이 날아와 가슴에 박히는 순간의 고통은 그 어떤 상처보다 강렬하게 남아 우리가 생명을 잃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다. 달콤 쌉싸름이란 미각적인 단어에 갇히기엔 환상이 주는 쾌락과 고통이 주는 아픔은 참으로 광범위하다. 굴절된 렌즈는 다채로운 빛이 가득한 세상에서 온통 짙은 잿빛 그림자 뿐인 세상으로 우리를 끌어당기고, 생명력에 활기를 끊임없이 갈아먹는다.
단순한 쾌락은 어떠한가?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대상을 잊기 위해 몰입하게 되는 쾌락적인 요소들은 건강을 앗아가고 정신을 공허하게 만드는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좋은 부류의 쾌락, 일종의 명작을 읽는 독서습관이나 예술에 가까운 영화를 보는 일은 때로는 더욱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곤 한다. 그리고 또한 건강한 쾌락을 받아들이는 걸 즐기는 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내 주변에는. 음식에 탐닉하거나 게임에 열중하거나 혹은 또다른 이성을 찾아 방황하거나. 단순한 패턴의 무한한 반복이 적당히 짤막한 인생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영원할 것처럼 보내던 시간들도 결국 언젠가는 끝이나겠지만, 나는 유한한 시간과 인생에 대해 좀 이른 나이게 깨닫게 되긴 했다. 그래도 인간의 만성화와 습관화를 벗어나 완벽한 붓다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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