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접하게 연결된 다양한 관계들, 그 사잇점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공통적으로 용납이 되지 않는 경계선엔 '불안'이 기저에 깔린다. 인간 근원에 존재하는 '불안감', 그것을 통해 인간은 세상을 그리고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불안한 토대 위에 지어진 모래성, 바닷바람에 날아가거나 폭풍으로 불어난 바닷물에 휩쓸려 버리기가 쉬운, 그러한 관계들의 연속. 생겨나면 사라진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하지만 예외적으로, 이 사람에게는 조금 더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자신도 기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면서)
그런 사람과 사랑 혹은 연애를 시작한다. 내게 타인보다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와준 사람. 어두운 공간에 작은 빛을 비춰준 사람. 그가 어떤 가면을 쓴 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은 없다. 어쩌면 가면 뒤의 실제 '그'는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하는 장님일 수도 있다. 진실을 볼 수 없는 욕망의 가면을 쓴 채 하루를 위한 쾌락을 소비하며 살아가는 그저 쾌락을 즐기는 생물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도 있다.
풍랑에 휘청이는 배에 서서 삐거덕 거리는 나무 판자를 밟고 그 위에 지어진 작은 모래성을 상상해보자.
지나치게 위태롭기 그지 없다. '인간관계'란 그런 것이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작은 틈이 예측할 수 없는 의외성을 띠며 불안을 가중시킨다. 신뢰는 바닥을 드러내고 자취를 감춘다. 사이를 파고드는 '이해'는 '이해관계'가 존재할 때만 가능한 일시적 협상에 불과하다. '이해관계'에서 '종속관계'로 넘어온 순간 갑과 을의 구도가 형성되며 더이상 갑은 을을 이해해줄 생각을 갖지 않게 된다. 마땅히 이해해야할 필요성이 없으니까.
애초부터 한 사람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거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것은 완벽한 '판타지'가 아닌가?
늘 변덕스럽게 일렁이는 바다가 그대로 멈추길 바라는 건 오히려 괴상한 일이 아닌가?
'사람'이란,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 유동적인 존재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 속의 인물들은 특정 인간의 몇가지 특징을 함축해놓은 캐릭터에 불과하다. 실제 살아움직이는 한 사람에게 들어있는 무수한 생각들과 개성과 스타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형태처럼 다양하며 셀 수 없이 많은 종류로 분류된다. 그러나 개성을 거세당한 상태로 성장한 성인의 개성은 타인을 모방한 카멜레온식 색 바꾸기에 지나지 않으며 내면은 텅 빈 상태가 된다. 불면 부는 대로 휘둘리는 성향이란 이렇게 형성되는 것이다. 몇 가지 성향 안에 자신을 가둔 채 다양성이란 측면을 고려하지 않고 딱딱하게 굳은 시멘트처럼 살아가는 삶. 삭막함과 서늘함뿐인 인생이다. 당연히 공허하다. 개성은 딱딱한 시멘트에 묻혀서 발악한다. 하지만 누구도 그 소리를 듣는 이는 없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굳혀버렸으니까.
그러한 상태에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타인을 향한 억누를 수 없는 끌림은 육체에서 오는 것인가, 정신에서 오는 것인가? 단연코 육체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정신이 텅 비어있는 상태라는 가정을 한다면 말이다. 육체의 매력이 소진되면 당연히 사랑도 사라진다. 그렇게 외적인 요인에 의한 사랑은 너무 쉽게 질려버리는 마치 상한 음식처럼 치부되는 것이다. 풍부한 하나의 정신과 다른 하나의 정신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매력이 아닌 남성과 여성 안에 제약된 상태에서의 육체적 끌림의 해소는 결국 그게 전부이자 시작이며 끝일 뿐.
작은 틈새는 어쩌면 삭막해진 개인의 성향을 가두어놓은 시멘트에 나잇는 틈새같은 것일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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