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rt thoughts

레비나스의 타인의 얼굴 그리고 니체

J.H. 2019. 3. 3.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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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의 타인의 얼굴을 읽는 중이다. 

낮에 잠깐 읽은 부분에서 레비나스가 주장한 부분이 나한테 쉽게 와닿지가 않았다. 지나치게 박애주의적이고 종교적으로 느껴졌다. 이기심과 이타심, 레비나스는 온전한 이타심으로 기울어진 논리를 주장한다. 물론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되기 위해선 이타적 성향을 키워나가는 게 맞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게 그렇게 일방적인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다. 이타적 성향을 가진 사람과 이기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두 사람 사이에서 희생은 이타심을 가진 사람이 짊어져야 한다. 게다가 이타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 평생 이타적으로 살지도 미지수다. 어느 날 갑자기 이타적 성향이 이기심으로 돌아서게 된다면 그게 사회적 악영향을 끼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지 않을까? 억압된 분노가 치밀어 이타심을 전부 증발시켜버린다면 말이다. 게다가 이타심이란 것도 의문인 것은 자신의 인내를 스스로에게 강요하면서 사회적으로 이타심을 실현 시킬 때 정신 혹은 육체에서 발생하는 과부하는 어떻게 처리해야하는 지에 대해서다. 운동, 명상, 여행 등 이런 방법들이 있긴 하겠지만, 일시적 회피와 망각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쌓여버린 억압은 표출될 장소를 찾게 된다. 병이라든가, 정신적 충격이라든가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때문에 레비나스의 자아의 주체를 확립하는 길과 타인을 받들어 모시는 자세의 공존은 동등선상에서 존재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 두 가지 관점을 동일 선상 위에 놓고 생각하기 위해선 게다가 그 두 가지가 한 사람 안에 전부 담겨진다고 가정 했을 때, 선행 혹은 타인의 행복 자체를 업으로 삼는 인생을 택하게 된다. 종교적 지도자 라든가, 세상을 위해 특수한 기술을 개발하고 그 벌어들인 수익마저 세상에 환원하는 인류 자체에 기여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드물다. 자신의 이익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사회의 공생적 구조 때문이다. 자신이 벌어들인 수익과 가족의 생계, 생활을 하는데 들어가는 필수적 비용들, 혹은 개인을 만족시킬 사치품들, 명예욕과 우월의식이 점점 삶으로 스며들고 같은 계층에서도 눈치싸움이 벌어진다. 

자본은 화폐화된 약속 어음이자 종이조각에 불과하지만, 그 돈이라는 것에 울고 웃을 수 밖에 없는 게 인생인 것이다. 

모든 것들이 밀접하고 복잡하게 또 입체적으로 연결된 상태에서 오로지 이타심으로만 사람을 대하는 것도 사기를 당할 가능성을 높게 만든다. 혹은 호구가 되는 수도 있다. 적절한 선에서 자신의 몫을 챙겨가는 그런 사람이 현대 사회에서 센스가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레비나스에서 니체의 주체에 대한 철학으로 옮겨가는 부분에서 난 또 다시 당황했다. 니체는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행위와 행위자로 분리할 수 없으며 이분법적 사고가 등장하면 사물이건 자연이건 전부를 이분법적으로 보려하지만, 그 안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번개란, 구름 사이에서 번뜩이는 섬광인데, 만일 섬광(행위)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누구도 번개를 입에 올릴 수 없듯이 행위만이 전부라고 한다. 즉, 이 부분에서 나는 골똘히 생각에 빠져들었는데 예전에 특정한 사람의 행동들을 분석하며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일까 고민했던 게 떠올랐다. 니체의 방식으로 본다면 그렇게 한 행동 그 자체가 그 사람이며 그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고민을 한 시간들도 정말 무의미한 것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는 생각도 든다. 그냥 그 행위 자체가 그 사람이라는 것, 어떠한 반론을 제시하기 힘들다. 이간질을 했으면 이간질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복수를 안 해주고 못 베기는 타입이라면 그 사람은 끊임없이 사소하고 작은 복수들을 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이다. 그러한 특징을 갖는 게 개성인 거고 그럼으로서 그 사람이 성립하고 존재하는 것이라고 봤을 때, 그 배후를 분석한다는 것은 (형이상적 심리분석일지라도) 어찌보면 정해지지 않은 답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답)을 상상의 세계 속에서 창조해 나가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는 거다. 


만일 그 행위 자체를 자아와 결부짓는다면 그 이면에 숨겨진 속내를 고민할 필요가 없어지며, 사람을 그 자체로 인식하는 단순한 시스템이 만들어 지는데 딱 그 정도의 상호교감만이 실제적으로 인간 소통에서 이루어지는 극히 일부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언어가 입력되고 반응이 오고가고 인식하고. 딱 3가지 구조로 이루어진 소통의 체계는 간결해진다. 


그렇다면, 만일 꿈을 이루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현실에 안주해 살아갈 때, 라는 가정을 해봤을 때, 그 사람은 꿈을 이룰 생각이 없이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인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한 시간도 돈도 없다는 말은 변명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물론 생계를 부담해야할 위치라면 실제적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핑계가 되는 것이고 가끔씩 꿈이 떠오르긴 하지만 그것을 이루고 싶을 정도로 간절하지는 않는 수준에 그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주입식 교육 시스템이 사람들의 개성을 증발시키는 방향으로 흘러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와중에도 자신의 꿈을 찾아서 이루는 사람이 존재함을 보고, 어쩌면 교육 방식을 바꾼다면 달라지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왔다. 그러한 내 생각에 대한 반론이 등장한 터라 급격한 스트레스가 몰려오면서 그대로 꾸벅이며 졸고 말았다. 이 부분에 대해 난 좀 더 비교할 것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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