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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주체

레비나스의 ‘타인의 얼굴’을 간간이 읽는 중이다. 타자의 주체성을 존중할 때에 비로소 자신도 존중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개념인데 이론적으론 완벽하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그것이 적용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것은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개개인의 특성에 기인하는 의문을 파생케 한다. 온전히 타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또 타자의 타고난 특성들을 하나씩 발견하며 타자를 입체적으로 파악해나갔다는 전제하에 타자의 입장을 자신보다 더욱 잘 이해하게 되는 수준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하여 타자가 내뱉는 생각들과 그의 가치관을 이해해주는 일방적 상황이 되었을 때 과연 타자는 나 자신에 대해 얼만큼 이해하고 있을까?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타자 자신만 이해받는 상황을 즐기며 자기 위..

my views 2019.01.03

퍼스널 스페이스

어느 장소에 가든지 (그게 집일지라도) 지나치게 밀접한 거리로 타인이 다가온다면 그 순간 다양한 감각이 내면에서 발생한다. 당혹감, 놀라움, 불편함, 강요, 신경쓰임, 방해, 침해. 한 마디로 불청객으로 취급받을 상황을 불러일으키기 된다는 말이다. 일정 시간을 공유하는 가족, 친구, 연인도 때로는 거북함이 차오르는데 하물며 완벽히 타자라면 어떠한가? 전혀 달가울 수가 없다. 퍼스널 스페이스를 처음으로 붕괴시키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사회화 과정을 내포한 필수교육과정인 학교 혹은 유치원이다. 개인과 개인이 부대끼며 소통하고 교류하는 것이 사회화의 첫계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외향적인 타입과 내향적 타입은 받아들이는 감각 자체가 달라진다. 내향적 타입은 말그대로 불편함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

my views 2018.12.21

삶의 일상성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은 늘 도처에 널브러져 있다. 머릿속에서만큼은 '히어로'지만, 현실은 그저 볼품없다. 늘 사람들 틈에서 부대끼며 하루하루를 반복적으로 살아나가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개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상성'일지도 모른다. 마주하는 사람들, 그들과의 관계, 매 순간 스쳐가는 사소한 생각들과 욕망들,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들. 작은 욕구들을 메워나가며 비뚤린 일상을 바로 잡으려는 의지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일상은 자꾸만 더 외부로부터 잠식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거대한 자본과 그 안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은 한편의 아이러니한 풍자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 역시도 그 안에 있는 한명의 페르소나일 뿐이지 않은가? '일상성'이 지켜지고 하루하루가 잔잔하게 흘러가기만 한다..

my views 2018.12.20

타고난 개성, 그 발화점

사람들은 저마다 타고는 개성 그 안에 재능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대다수가 태어나면서부터 짊어지는 재정적 불완전함은 개성과 재능의 씨앗을 단숨에 짓뭉개버린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을 자유롭게(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단 전제하) 펼치며 살아갈 수 없는 것일까? 나의 물음은 늘 같다. 그리고 세상의 침묵도 늘 같다. 기본 욕구의 충족과 해소. 그리고 일상. 같은 사이클. 삶의 키워드들이다. 예전엔 사람들에게 계기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을 고비에서 살아난 극단적인 상황이라든지, 운명을 관통하는 감각을 따라 꿈을 쫓게 된다든지.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생각은 변했다. 자본으로 돌아가는 세상. 부족한 생활비와 꿈보다 성공을 외치는 사회. 1등이란 만들어진 가이드라인, 그 위를 경쟁하며 걸어야 하는 무..

my views 2018.11.21

환멸의 순간

허상을 쫓고 있단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삶이란 시각적인 환상으로 채워진 레일 위를 달리는 순간의 연속이다. 다양한 선택들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인생이 펼쳐진다. 아니, 사실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종착역은 ‘죽음’이니 말이다. 허상이란 배경들 속에 타인들도 포함된다. 우리가 느끼는 건 결국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환상과 빛에 반사된 물체의 색, 그리고 형태에 대한 촉감, 특정한 향기,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뉴런과 시냅스의 확장. 소리를 통한 세계의 인식, 혀를 자극하는 질감과 맛. 이러한 본능적이고 지각적이며 감각적인 영역의 것들로 삶은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실재이면서도 인식과 관련된 요소들이며 육체의 인식기능이 저하되면 (건강을 잃거나 노화로 인해) 일종의 막 혹은 벽이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것처럼..

my views 2018.11.20

회사 안, 회사 밖

회사란 틀을 벗어나면 '사회'의 외적영역에 거주하는 '이방인'이 된다. 어딘가에 속하지 않았단 불안과 자유가 공존하는 일상. 새벽 취침과 한낮 기상은 처음 며칠동안은 달콤한 꿈같지만 그 이후부턴 끊임없는 악몽의 근원으로 돌변한다.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악습관'을 몸에 정중하게 새겨넣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덕(Arete)이란 좋음의 요소를 습관화해 하나씩 꾸준히 쌓아갔을 때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상태라 말했다. 좋음이란, 플라톤의 국가에서 말한 과정도 좋고 결과도 좋은 일석이조의 상태를 말하는 것 같다. 방청 알바로 갔던 강연에서 그리스 철학에 관한 강의를 했던 탓에 흥미롭게 들을 수 있었는데, 내가 현재 고민하고 있는 부분들을 다시금 일깨워 되돌아볼 계기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my views 2018.11.13

안정감 그리고 이성과 감성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안정감’이란 참 중요한 것이다. 가족, 친구, 함께 일하는 동료들 그리고 연인. 네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루었을 때 한 사람은 온전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상에게서 안정감을 얻는 차이도 존재한다. 누군가는 가족 혹은 친구가 자기 삶의 중심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연인이나 회사가 중요할 수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내내 불완전함에 시달리다가 관계로 인한 친밀감을 기반으로한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의 달콤함을 ‘꿀맛’같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안정감이 무너지는 순간 인간의 삶은 눈깜짝할 새 나락으로 떨어지고 일상을 반복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나는 바로 그 점이 신기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안정감과 ..

my views 2018.10.14

사회와 인간

주입식 교육에 의해 개성은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면 개성으로 표출될 에너지가 쾌락을 통해 소비되는 것으로 변형되는가?망각이 찾아오는 지점은 개성이 흐릿해지는 순간이다. 개성은 무엇일까? 주입식 교육 이전에 존재하는 타고난 본성이다. '사회화'라는 과정이 인간에게 주는 혜택 이면엔 '개성의 상실'이란 부작용이 있다. 혼란스러워진 마음은 관습적인 행위를 택한다. 인간의 3대 욕구에 충실한 본능을 채우는 것에 급급해진다. 자동반사형 사이클에 몸을 내맡긴 채 '개성'은 죽어가고 있다. 세상에 넘쳐나는 각종 즐길 거리는 망각을 부추긴다. 업무에 대한 중압감과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떨쳐 내는 방식은 상업화에 따라 오로지 '쾌락 소비'에 집중된다. 게임, 유흥, 도박 등의 각종 쾌락 극대화 시스템은 한계점을 ..

my views 2018.10.11

타자의 시선

탈자기화된 시선으로 타자가 되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쉽다. 하지만 타자에서 또 다른 타자가 되어 타인들을 응시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타자를 응시하는 나는 원래의 '나'도 아니며, 그렇다고 타자 그 자체도 아닌 또 다른 '무엇'이다. 나는 일상에서 곧잘 그러한 제3의 타자가 될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떠오르는 질문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다.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는 나와 너라는 단편적 개념이 아닌 전세계적으로 확장되어 한 세대를 아우리는 우리들을 뜻한다. 실컷 생각없이 놀다가도 불현듯 저러한 질문이 떠오르면 당황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데, 그 때마다 나는 대체 어떤 대답을 원하는 것일지 고민하게 된다. 분명 저 질문은 내 자신이 나에게 던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질문에 답을 한다 하여..

my views 2018.10.10

자본주의 단상

‘돈’이라는 매개물은 환상에 불과하다. 일종의 물질적 매개 행위를 위한 약속 어음이다. 그러한 자본이 인간 노동의 소외를 일으키는 도구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구상의 수많은 인간들의 성향을 놓고 보았을 때 누군가는 차별화된 삶을 꿈꾸며 그들은 최상의 것들만 선취하기 위한 시스템을 고안해낸다. 과거엔 귀족과 노예제도가 있었지만 현재는 부자와 빈자가 있다. 과거의 계층 차이는 탄생한 핏줄에서 시작되었고, 암암리에 신분세탁이 이루어져 귀족이나 양반으로 탈바꿈 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어찌됐건 편의적 서비스를 제공해 통화나 물질적 자원을 축적하면 그는 결국 많이 가진 자인 동시에 여러 가지 기회를 쉽게 손에 넣어 대다수의 사람들 위에 군림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현대사회는 어떠한가? 확대 재생산 되는 상..

my views 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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